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장진호 전투는 한중국경을 향해 북으로 진군하던 유엔군과, 국경을 넘어 남으로 진군해온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이 승리함으로써 UN군이 38선 이남으로 완전히 철수했다. 주어진 조건과 누가 더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생각하면, 2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3배에 가까운 피해를 안겨준 연합군이 승리했다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hosin_Reservoir|영문 위키백과]]에는 전투의 결과를 ‘중공군의 전략적 승리, 연합군의 전술적 승리’라고 기재했다. 하지만 [[전쟁]]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군사적 수단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UN군의 목적은 한중국경을 향해 진격해 나가는 것이었고, 중공군의 목적은 UN군의 진격을 저지해 턱 끝까지 치고 올라온 전선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설령 전투의 교환비가 어떻든 간에 목적을 쟁취한 쪽은 연합군이 아니라 중공군 쪽이다. 막말로 K/D 비율이 높은 쪽이 승리하는게 전쟁이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추축국의 승리로 끝난 전쟁이 되고 [[베트남전쟁]]은 북베트남이 패배한 전쟁이 된다. 그러므로 애써 중공군의 승전을 깎아내리는 것보다 UN군 사령부의 전략적 실책에 주목하는 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중요하다. 미 육군 공간사인 『밀물과 썰물 Ebb and Flow』에 첨부된 미 육군 제10군단의 인원손실표에 따르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0일까지 [[미 해병대]] 제1사단은 1만 5천 명 중 총 2621명(전사 393명, 부상 2152명, 행방불명 76명)의 손실이 기록되었고, [[미 육군]] 제7보병사단은 총 2760명(전사 70명, 부상 185명, 행방불명 2505명), [[한국 육군]] 수도사단은 총 778명(전사 126명, 부상 318명, 행방불명 334명) 한국 육군 제3사단은 총 148명(전사 15명, 부상 127명, 행방불명 6명)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총 93명(전사 13명, 부상 80명, 행방불명 0명)의 손실을 기록했다. [[파일:external/farm4.staticflickr.com/2919573205_5a3a5035a8_z.jpg]] [[파일:external/farm4.staticflickr.com/2919573815_606e6c0d2d_z.jpg]] [[함흥]]에 묻힌 제1사단 전사자들. [[http://www.flickr.com/photos/imcomkorea/2919573205/|#]] [[http://www.flickr.com/photos/imcomkorea/2919573815/|출처]] 다만 ‘미 10군단을 [[함경도]]에서 밀어낸다’는 목표가 달성됐다고 해서 중공군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다. 미 제1해병사단을 상대로 [[야전군]]급 제대인 9병단 전체를 동원하여 사방에서 포위공격을 가한 데서 알 수 있듯, 중공군은 처음부터 제1해병사단의 섬멸을 우선적 작전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미 해병대는 포위망을 구축한 중공군 10개 사단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함흥으로 돌파하여 빠져나감으로써 중공군은 작전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당시 미군은 퇴각 중이었기 때문에 교전한 중공군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제1해병사단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사단이 7개 중공군 사단에 괴멸적 타격을 입혔고, 다른 3개 사단에 대해서도 부분적 타격을 입혔습니다."라고 비교적 정확하게 미 해병대 사령관에게 보고하였다. 중공군 제9병단이 입은 피해는 당초 10월 15일-12월 15일 중에 전사 2만 5천, 부상 1만 2500명 정도로 파악하였다.[* 정확한 피아사망 비율은 미군은 육군을 추가해야 하고, 진실을 축소, 은폐하는 공산진영의 특성상 중공군은 언제나 불분명하여 정확히 따지기 힘들다.] 중국은 외부에 공개하기를 꺼려 공식기록을 기밀로 묶고 제한된 연구자에게만 열람을 허용하기 때문에,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이 피해를 얼마나 입었는지도 간접적 추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여러 경로로 중국 측 데이터들이 조금씩 공개되며, 이전보다 상세한 숫자들이 알려졌다. 이후의 [[http://www.81.cn/jwzl/2016-06/07/content_7091119_3.htm|자료]]들에서 인용하는 제9병단의 피해 규모는 전투손실이 사상자 1만 9002명, 대부분 혹한 속 [[동상]]이 원인이었던 비전투손실이 사망자 약 4천 명 포함 2만 8954명에 달해 전체 사상자 수는 약 4만 8천 명이다. 중국의 공식 기록은 실제 피해를 축소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실제 피해는 분명 이보다 더 컸을 것이다.[* 서방 측에서 경상으로 분류해 사상자로 집계하는 경우를 누락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펑더화이]]가 12월 8일에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문에서 6만 명의 보충을 요구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제9병단 예하 제20·27·26군은 너무 피해가 큰 나머지, 출병 이전에 추가로 받았던 제89·94·88사단을 모두 해체하여 다른 사단을 재건하는데 써야 했다. 이로 인해 다시 3개 사단 체제로 환원된다. 결국 중공군 제9병단은 이 전투에 거의 전 전투력을 몰아넣었으나, '미 해병대를 완전히 섬멸한다.'는 작전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미 해병대와의 전투에서 너무 막심한 피해를 입어 미군 제10군단의 다른 사단들이 안전하게 철수하는 것도 눈 뜨고 바라보아야 했다.[*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영문 위키백과는 아예 중공군의 Pyrrhic victory, 즉 [[피로스의 승리]]로 기술했다. '상처뿐인 승리'라는 의미.] 중공군은 4만 8천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강요당한 것에 더해, 부족한 보급 속에서 강추위에 시달린 나머지 남은 병력들도 탈진하여 도저히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제10군단 전체가 유유히 [[흥남 철수]]를 완료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관해야만 했다. 중공군의 보급상황은 매우 비참했다. 사흘간 먹은 것이라고는 얼어붙은 날[[감자]] 2개였던 적도 있었다. 수문교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 파견된 중공군이 극심한 추위에 얼어붙어서 항복하려고 총을 버리려고 해도 총이 얼어붙어서 손에서 안 떨어진다든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열악한 보급으로 전투는커녕 움직이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요지의 중요성과 방어진지의 견고함에 비해 의외로 미군이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쑹스룬 장군은 직접 "'''향후 보급 체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중공군 군사 전략이 인민전쟁 노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공군은 자국 내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기본 전제하에서 모든 면이 발달해서 이런 식의 전쟁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해병사단의 사단본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사단급 CP가 있는 곳은 대체로 최전선 전투 현장에서 거리가 꽤 되고, 사단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최전선에 지원 갈 전투근무지원과 일반근무지원 기능을 가진 부대들도 사단 CP 주변에 덩달아 주둔하며, 여기엔 사단급에서 관리하는 자체 보급품 집적소도 포함된다. 다만 장진호 전투에선 해병사단의 부대들이 각개 분산되었고, 중공군은 각개격파와 후방 차단을 목표로 미 해병들의 거점들을 포위하고 공격해서, 사단 본부가 있던 하갈우리도 결코 후방 섹터는 아니었다.]가 있던 하갈우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화력이 1선 병사에게 집중되고, 방어선 내부에 있던 보급품 집적소의 연료나 탄약에는 별로 사격을 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보급은 적에게서 구한다''''는 중공군의 기본 보급방침도 있었고, 만일 연료나 탄약에 사격해서 불바다를 만들면 당장 이길 수는 있지만 험악한 산골짜기에서 물자가 없는 미군 포로와 중공군이 함께 사이좋게 굶주리고 얼어죽을지 모른다는 우려의 합작품이다. [[흥남 철수]]가 마무리되며 큰 고비를 넘기자, 중국군 수뇌부는 제9병단의 피해상황을 보고받은 뒤 "아예 병단 전체가 다시 동북(만주) 지방으로 돌아와 재편성 및 보급을 받으라." 하고 권고했다. 그러나 [[쑹스룬]]과 예하 지휘관들은 '강추위를 뚫고 다시 북으로 이동하는 것도 버겁다.'고 판단하여 "그냥 현 위치에서 재정비를 하겠다." 하고 회신했다. 한편으로는 중국으로 돌아갈 경우, 문책을 받고 다시 참전하지 못할 가능성도 우려했다고 한다. 이로써 제9병단은 북한 동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고 후방에 머물렀다. 이렇게 제9병단 병력이 최전선에서 이탈하자 중공군의 차기 작전에도 큰 지장이 생겼다. 전세가 한창 최고조에 달했던 [[1.4 후퇴]] 등 주요한 작전에는 아예 빠졌고, 1951년 3월에야 겨우 재편성을 마치고 전선으로 복귀했다. 만약 제9병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전력을 온존한 채 서부의 제13병단과 함께 좌우 원투 펀치를 날렸으면, 과연 UN군이 어디까지 후퇴했을지 알 수 없다. 1950년 12월 23일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후임으로 임명된 육군 참모차장 매튜 리지웨이 중장은 26일 한국으로 도착하자마자 알몬드 제10군단장을 불러 '제10군단이 제8군에 예속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미리 일본에서 맥아더 원수를 만나서 전권을 부여받았다. 책 <콜디스트 윈터>에 따르면, 리지웨이는 부임 후 알몬드를 만나 장시간 독대를 해서 군기(?)를 잡았다고 한다.] 잘못된 지휘체계를 이제야 바로잡은 것이다. 이후 알몬드는 군단장으로 반 년 더 유임되었고, 유엔군의 재반격 시기에 북한에서 철수를 최소의 인적 및 물적 손실만으로 성공시킨 공로[* 엄밀히는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의 일부만 손실이 컸지, 당시 제10군단 전체로 볼 땐 극심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던 듯하다. 또한 [[흥남 철수작전]]도 해군의 지원이 컸지만, 육지 파트에서 온갖 지상군 부대의 해상 철수를 조율한 최고위자는 바로 알몬드(+그의 참모들)로, 그의 결단으로 민간인 9만 명이 남한으로 피난할 수 있었고, 병력뿐만 아니라 장비물자들도 버리지 않고 가져간 공은 있다. 그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무능했다면, 흥남철수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로 중장 진급에 성공했으나,[* 미 육군 수뇌부는 이것을 맥아더 원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표시라고 했다. 51년 3월까진 맥아더의 영향력이 컸고, 그를 달래려고 여러 가지 회유책(?)을 썼다. 알몬드의 계급을 올려준 것도 그 일환이었던 것 같다. 물론 맥아더가 해임된 후, 그의 후원을 받았던 측근들은 깡그리 망했다.] 그는 1951년 상반기에 있었던 굵직한 전역, 전투에서 제10군단장으로 지휘했고, 전쟁이 진지전으로 변해가던 1951년 7월 전출되어 미 본토의 육군대학 학장으로 임명된 뒤 1953년 전역했다. 사망은 1979년. 장진호 전투를 훌륭하게 수행한 스미스 소장은 1951년 미 본토에 있는 캠프 펜들턴 해병기지 사령관을 지내고, 1953년 7월에 중장으로 진급, 대서양 함대 해병대(FMF Atlantic) 사령관을 거쳐, 1955년 9월 1일 대장 진급 후 예편하였고 1977년에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 중장은 한국으로 부임한 지 3일째인 12월 19일, 제7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을 해임했다. 7사단은 맥아더 직할이라, 이전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때 2보병사단장 로버트 매클루어, 24보병사단장 존 처치, 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도 함께 해임된다. 다들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와 무질서한 퇴각의 장본인이었다. 정작 졸렬한 지휘로 대패를 당하고 무질서한 후퇴 지시를 내린 주모자 맥아더는, 이 패배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력 및 한국전 개입 가능성에 대한 오판, 군우리에서의 참패, 서울을 빼앗기고 [[평택]]까지 후퇴하는 등 여러 실책으로, 맥아더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맥아더는 “즉각 중국 연안을 해상 봉쇄하고 중국 산업시설을 폭격이나 함포 사격으로 파괴하며, 장개석 군을 중국 본토로 상륙시킬 것”을 주장했다. 결정적으로 1951년 1월 28일 맥아더는 [[수원시|수원]]에서 리지웨이 장군을 만나면서도 기자들 앞에서 확전 발언을 일삼았으며,[*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가 있었던 중공군 2차 대공세 때는 [[도쿄]] 최고사령부에서 며칠간 두문불출하며 정신적 공황에 빠져 있다가, 새로 미8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리지웨이 장군이 [[지평리 전투]]에서 대승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처음 막아내자 바로 [[수원]]으로 날아와 자신의 지휘로 중공군을 막아냈다는 드립을 친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때 리지웨이 장군이 분노했다고 한다. 미군 장군들이 맥아더를 싫어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거듭된 언론 플레이 자제령을 무시하였다. 이어 3월 24일에는 워싱턴으로부터 받은 비밀 전문을 언론에 알렸으며, 4월 5일 맥아더가 쓴 '[[장개석]]의 중화민국군을 투입하여 확전해야 한다.'는 서한이 미 하원에서 공개되자,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빡쳐서 4월 11일 그를 파면하였다. 이에 대한 트루먼이 사적으로 밝힌 견해는 다음 두가지가 있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총독이자 극동지구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는 거지. 자신이 [[미군]]의 총사령관인 [[미국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 일개 장군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가 멍청한 개자식이었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그를 해고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고했다. 한편 중공군 수뇌부는 장진호에서 보급 문제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경험하고 '''더 이상 전쟁을 끌어봤자 미국을 이기기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아, "보급 문제도 그렇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기에는 여러모로 문제도 많고, 미군의 북한 영토에서 몰아내면서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도 채웠으니 이쯤해서 전쟁을 끝내자"는 결론을 내리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러한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미국을 종이호랑이라 판단, 현지 사령관들이 부정적인 의견을 올림에도 불구하고 “남조선까지 해방시키겠다”면서 대대적인 남진을 명령했다. 그렇게 중공군은 [[38선]]을 넘어 [[서울]]을 재점령하고 북위 37도선 [[평택]]-[[제천]]-[[삼척]] 선까지 진격[* 공교롭게도 이 선은 현재 [[평택제천고속도로]]가 뚫려 있다.]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애써 무시하려 했던 보급 문제가 중공군의 발목을 잡았고 그 무렵 리지웨이가 유엔군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공군의 막대한 인력에 맞서 유엔군의 화력을 극대화하는 [[제임스 밴 플리트|화해(火海)전술]]을 선보이자 다시 38선을 넘어 패주했다. 이런데도 마오쩌둥은 남조선 적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1951년]] 봄 7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대규모 춘계공세를 감행했으나, 유엔군의 저항에 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양자 모두 '더 이상 상대를 섬멸하고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휴전협상으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